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셀주크 제국 (문단 편집) == 초기 역사 == [[파일:Toghrol_Tower.jpg|width=500]] 이란 [[라이]]에 위치한 투그릴 영묘 역사가 [[알 아시르]]에 의하면 셀주크 베이의 부친 '''두카크'''는 튀르크계 오우즈 야브구국의 장군이었다고 한다. 일부 아랍 문헌들은 그가 셀주크 왕조가 이슬람화되는 과정에서의 최초의 인물이라고 묘사했다. 하여튼 두카크가 죽은 뒤 그의 아들 '''셀주크'''가 등장하여 [[오우즈]]족 사이에서 이름을 떨쳤으나[* 튀르크계 [[하자르]] 칸국에서 경력을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.], 오우즈족의 야브구(왕)와 싸우고 나서 자신의 무리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지금의 크즐오르다에 정착했다. 대충 이 시기는 960년대로 예측되며, 역사가들은 셀주크 가문이 이때 즈음해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. 이즈음 [[트란스옥시아나]]는 [[사만 왕조]]와 [[카라한 칸국|카라한 왕조]]가 패권을 다투고 있었고, 본래의 고향에서는 오우즈 족속들이 킵차크([[쿠만]])인들과 전쟁 중이었다. 셀주크인들은 강대한 세력들 사이에서 실익을 추구하여 세력을 자주 바꾸었다. 하지만 결국에는 사만 왕조의 편을 들어 카라한 왕조를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서 몰아내고, 그 보답으로 사만 왕조로부터 그 땅에 정착할 권리를 보장받았다고 한다. 하지만 셀주크는 일족이 이곳에 정착하는 도중에 본래의 정착지인 크즐로르다에서 죽었다. 셀주크가 죽은 뒤에 그 세력은 중앙아시아적인 관습에 따라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. 이 아들들의 이름이 '''미카일''', '''이스라일''', '''무사''', '''유누스'''인데, 참고로 말하자면 이 이름들은 《성경》에 나오는 [[미카엘]], [[이스라엘]], [[모세]], [[요나]]에서 유래한 이름들이었다.[* 이 때문에 몇몇 역사가들은 셀주크가 [[하자르]] 유대교도거나 [[경교|네스토리우스 그리스도교]]도라고 추측했다. 하지만 르네 그루쎄는 이 이름들은 무슬림들도 쓰는 이름이라며 이 주장을 무시했다.] 어쨋든 이들 중에 역사에 이름을 진하게 남긴 것은 미카일과 이스라일이었다. 미카일의 아들이 투으룰 베이와 차그리 베이로, 훗날 '''대 셀주크'''라 불릴 셀주크 제국을 건국했다. 이스라일은 그 본인이 '''[[아르슬란 야브구]]'''('''사자왕''')라는 호칭으로 이름을 날렸고, 그 후손들은 [[룸 술탄국]]이라 불리는 국가를 소아시아 반도에 만들었다. 셀주크의 아들들은 서로 다른 진영에 가담해 싸웠던 것 같다. 이 과정을 간략히 적자면, 사만 왕조는 결국 카라한 왕조에 의해 호라산에서 쫓겨났다. 이때 사만 왕조는 [[가즈나 왕조]]을 호라산으로 불러들였고, 이후 호라산에는 가즈나 세력과 카라한 세력이 맞붙어 전쟁을 치렀다. 이 틈을 타 셀주크인들은 호라산에 침입하여, 승기를 잡고 있었던 가즈나 세력을 [[단다나칸 전투]]에서 격파하고, 가즈나 술탄국을 가즈나로 밀어내 버렸다. 여기서 미카일의 아들인 '''투으룰'''은 이란 서부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했고, 그 동생 '''차그리'''는 호라산을, 그 외 친척들도 각지에 았는 영지를 얻었다. 그들은 각각 완전히 독립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면서도 가문의 수장인 투으룰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금요 예배의 설교에서 자신들의 이름보다 투으룰의 이름을 먼저 언급했다. 이는 당시의 [[부와이 왕조]]나 후대의 [[몽골 제국]]과 유사한 가족 경영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